검색창

[Aeon Ideas] '클리셰' 밖에서 '클리셰' 생각하기 칼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올브레인뉴스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372회

본문


 two women wearing pink skirts
@evocative_thread unsplash.com  



[Aeon Ideas] 

'클리셰' 밖에서 '클리셰' 생각하기

At the end of the day, think outside the box about clichés 
 



 

written by. Nana Ariel


작가, 텔아비브 인문 대학 강사이자 MINDUCATE 센터의 혁신 학습 선임 연구원이다. 

수사학과 시학 전문이며 텔아비브에 살고 있다.




클리셰에 대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신이 그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뒤떨어진 사고, 상상력의 부족, 창의성 결여의 징후로 멸시받는다. 다행히도 말하고 쓰고자하는 것들을 잠시만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대개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아니, 그런가?


여기서 클리셰란 틀에 박힌 대사에서 상투적인 묘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더 흔하거나, 혹은 흔하다고 기꺼이 인정할만한 너무 자주 사용되는 진부한 표현 수단들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클리셰를 가혹하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지만 텔아비브 대학의 수사학자인 루스 아모시는 실은 클리셰가 다른 사람들과 결속하고 서로 이해하는 양식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 "잘 지내고 있어요."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에서 클리셰는 말의 전제를 의심하거나 새로 구성할 필요성을 비껴감으로서 의사소통의 공통기반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효율적인 상호작용을 촉진하고 사회적 관계를 재확인하는 일종의 정신적 공유 알고리즘이다.


그렇다면 진부한 말이 언제부터 사람들의 소통에서 죄악이 되었으며, 단순한 정신과 그저 그런 예술가들의 표식이 되었을까? 관습의 단점을 인식하는 것을 분명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대부터 비평가들은 진부한 언어 패턴의 약점을 지적했고, 그것을 신랄한 패러디를 위한 사료로 사용했다. 그 예로 소크라테스는 공허하고 기계적인 관습을 조롱하고 폭로하는 일에서 전문가였다. 플라톤의 대화 <메넥세노스>편에서 그는 죽은 이를 과장하여 추켜세우고 그들의 죽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투적인 추도문을 모방하면서 기나긴 조롱조의 장례 연설을 한다. 그로부터 훨씬 이후에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등장인물 돈키호테는 중세 기사도의 영웅적 클리셰에 사로잡혀 상상 속의 적들과 전투를 치른다.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허공에 주먹질‘(tilting at windmills’ cliché) 이라는 표현이 여기서 비롯됐다.) 소네트 130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사랑하는 사람을 찬미하기 위한 상투적 비유로서의 클리셰(태양처럼 빛나는 눈, 장미같은 뺨)를 재치 있게 거부하면서 그러한 '거짓 비교'의 진부함과 위선을 강조했다.


그러나 관습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관습과 형식이 예술의 토대가 되는 특정한 전근대적 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창의성과 총체적 독창성 사이의 연결고리는 18세기 후반에 형성되어 진부한 언어에 대한 더욱 강력한 비난을 이끌어냈다. 사실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클리셰'라는 단어는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 19세기 후반 프린터의 판에 납을 녹이는 '찰깍' 소리를 흉내낸 의성어로 등장했다. 이 단어는 처음에는 인쇄판 그 자체를 부르는데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미리 만들어진 형식과 같은 표현 수단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되었다.


‘클리셰‘라는 용어가 현대 인쇄기술과 관련하여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공 영역에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대중 매체 그리고 사회의 등장과 함께 산업 혁명과 그 구성원들은 속도에 표준화에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언어와 사고의 산업화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고정관념'(stereotype)이 인쇄판이나 패턴을 지칭하는, 인쇄산업에서 파생된 또 다른 용어라는 점에 유의하라.) 그렇다면 관습성이 지성의 적이 되는 것은 근대의 뚜렷한 특징인 듯하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클리셰’는 상투적인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그것은 독자들이 상황에 마주해 식별하고 방향을 잡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며, 따라서 아이러니하거나 비판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프랑스 소설가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브레이스웨이트의 통념사전” (Braithwaite's Dictionary of Accepted Ideas, 1911-13)은 19세기 사회풍조와 대중 지식, 얄팍한 여론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전형성을 열망하는 수백 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문-프랑스어: 배워라,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들과 직접 어울려라. 술: 모든 현대 질병의 원인. 식민지: 이에 대해 언급할 때는 슬픈 기색을 보여라.) 이처럼 플로베르는 ‘클리셰’ 즉, 상투적 언어의 정신적, 사회적 퇴보를 공격하며, 기성관념은 정치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예고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클리셰’에 대한 비난을 감행하고 있는 한편으로, 글의 실체는 이것의 강력한 전략적 활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플로베르의 추종자인 프랑스의 이론가 롤랜드 바테스도 ‘클리셰’의 정치 효과에 몰두하고 있었다. Mythologies (1957)에서 발췌 한 'African Grammar'에서 그는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 대한 대중적 묘사가 정치적 잔혹성의 현실을 어떻게 위장하는지 드러내기 위해 가면을 벗겨낸다.(식민지 지배하의 사람들은 늘 '인구'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묘사된다. 식민지 주민들의 '사망'은 지시한 '임무'에 따른 행동으로 묘사된다.) 같은 책의 'The Great Family of Man'에서 그는 '우리 모두가 행복한 한가족이다.'이라는 상투적 표현이 문화적 불의를 공허한 보편주의적 언어와 이미지로 위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클리셰’를 통렬하게 비난하는 이와 같은 풍조를 계속 이어나갔다. 자신의 에세이 '정치와 영어'(1946년)에서 그는 저널리즘적 ‘클리셰’들이 정치적 현실을 공허한 언어로 가리는 위험한 구성물이라며 비난했다. 그는 생명력 없는 은유('어깨를 나란히 협력하여', '~의 손에 놀아나다', 실질적 기능이 없는 표현('경향성이 있음을 보이는', '심각하게 고심이 필요한'), 과장된 형용사('장대한', '역사적인', '잊지 못할'), 그 외 다양한 의미 없는 단어들('낭만적인', '가치', '인간적인', '자연스러운' 등)을 비난한다.


‘클리셰’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그 즉시 매혹적이며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두 개의 중대한 사각지대를 공유한다. 첫째, 그들은 클리셰-상투적 언어가 항상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며 결코 작가 자신이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클리셰’가 의사소통에 있어 본질적이고, 거의 피할 수 없으며, 문맥적 해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겉보기에 진실하고 효과적인 말은 다른 관점에서 진부한 표현으로 해석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3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 진부한 표현이라고 선언하면서도,  자신의 연설에서는 '미래 세대를 보호해야 한다', '함께하면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나에게 분명히 하자'와 같은 진부한 ‘클리셰‘들을 끊임없이 사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클리셰에 대한 비난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다. 그것들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반드시 우리가 언어의 반복적 특성과 이에 따른 침식 효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순한 복사기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특정한 목표를 위해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또한 합리적으로 ‘클리셰’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흔히 사용되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과 같은 말, 또는 진부한 표현들을 역설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클리셰‘는 항상 문맥에서 사용되며, 문맥에 따라 평범한 위치에 중요한 기능을 부여한다. ’클리셰‘는 그 악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만들어낸 '밈'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본다면 ‘클리셰’를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밈은 담론을 통해 자기복제를 하는 기성 문화의 인공물로 정의된다. 산업화의 기술혁명에 따라 ‘클리셰’를 중심으로 한 생각들이 번성했듯이, 밈에 대한 생각은 디지털 혁명에 발맞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밈의 확산이 그 성공을 의미하는 것과 별개로, 더 많은 사람들이 ‘클리셰’를 사용할수록 그 효과는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중적인 밈과 같은 ‘클리셰’는 영역 전체에서 그 징후가 동일하지 않다. 밈은 많은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이 논평 없이 공유된다 하더라도 때로는 공유 행위 그 자체로 개별적 입장을 창출한다. ‘클리셰’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들은 특정한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이것은 그들을 다양한 유형의 상호작용에 효과적이도록 만든다.


그러니 다음번에는 '너무 상투적이야!' 라며 밀어내기 전에, 당신이 흔하게 사용하는 ‘클리셰’들을 떠올려 보라. 그것은 당신 주변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서 전형적으로 쓰이는가? 통용되는 안부 인사, 정치적 발언 또는 다른 의견을 담고 있는가? 이 글에서 몇 가지를 발견하지는 않았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신에게도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것들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같다.





  

6fb671461e79357f75ea0f2330c5b8c4_1541736611_4099.JPG

올브레인에서는 해외 주요 대학 출판사 및 연구기관과 함께 철학, 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발행하는 디지털 문화 매거진 AEON의 글을 선정하여 소개합니다. 

원문과 더 많은 글은 위 로고에 연결된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Aeon counter – do not remove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