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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on Ideas] 조레스 메드베데프, 그리고 소련 과학의 진실을 위한 싸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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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레인뉴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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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in illustration 
Soviet Artefactsunsplash.com    



[Aeon Ideas] 

조레스 메드베데프, 그리고 소련 과학의 진실을 위한 싸움

Zhores Medvedev and the battle for truth in Soviet science 
 



 

written by. Michael D Gordin


로젠가르텡 대학의 근현대사 교수이자 뉴저지주 프린스톤 대학의 인문사회 연구원 소장.

최신 저서로는 A Well-Ordered Thing: Dmitrii Mendeleev and the Shadow of the Periodic Table (revised edition, 2019)가 있다. 





조레스 메드베데프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말, 93번째 생일의 하루 뒤에 사망한 다작의 러시아 과학자이자 작가는 그와 다른 주장들을 반복하는 강력한 다수의 적을 만들었다.


1961년 경, 메드베데프는 노화가 단백질과 핵산 합성의 오류 축적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소련 안과 밖에서 선구적인 노인학자로 강한 명성을 얻었다. 오늘날 이 관점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나, 공식적인 소련 사회에서는 일종의 이단이라고 여겨졌다. 메드베데프는 생물학에서 역사로 전향한 1962년 말 니키타 흐루쇼프 총리 시절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메드베데프는 유전학 연구가 매우 설득력 있음을 밝혀내고 나서, 어떻게 트로핌 리센코라는 이름의 농업학자가 이러한 유전학 연구를 근본적으로 범죄화함으로써 소련의 생물학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어했다. 


메드베데프는 가능한 모든 문서와 인터뷰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나온 그의 원고는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과학계에서 널리 유통되었는데, '생물과학과 인격의 교배'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글은 조셉 스탈린이 리센코를 지지함으로써 그의 독재적 공포를 과학에 주입하였고, 이로써 생물학에 불법적으로 개입했음을 주장했다. '개인숭배'라는 용어는 1956년 스탈린을 맹비난했던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에서 직접 끌어냈으며, 메드베데프의 원고는 흐루쇼프의 연설처럼 표적 리센코에 대한 반대의 동원을 거들었다. 1965년 리센코의 가장 영향력 있는 후원자인 흐루쇼프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그의 동맹국들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 후 소련 과학원은 리센코가 사기와 관리 부정을 저질렀다고 결론지었다. 리센코는 대부분의 지도직에서 물러났으며 생물학의 독재자로 전락해 추방되었다. 메드베데프는 흉악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메드베데프는 1925년 11월 14일, 트빌리시에서 그의 쌍둥이 형제이자 자주 그의 공동 저자가 되었던 로이와 함께 태어났는데 당시 트빌리시는 소련 사회주의 연방 트랜스코카시아의 최고의 도시였다. 리센코에 반발하는 목소리를 낸 이후로 그는 양심적인 과학자, 도덕적 선구자로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스탈린주의 시대에 성인이 되었으며 냉전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과학자 집단의 사회학적 표본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 시작한 소련 반체제는 그러한 과학비평의 가시성과 힘에 의하여 특징 지워졌다. 그것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전례 없는 과학 진흥의 놀라운 유산 중 하나였다.


레닌그라드의 정치-군사 학교에서 강의를 했던 메드베데프의 아버지는 1938년에 체포되어 멀리 떨어진 콜리마 강류의 굴라그-소련 강제 노동 수용소 로 보내졌고, 1941년 3월 사망했다. 메드베데프는 1943년 적군파에 징집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코카서스 타만 반도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는 모스코바에 위치한 티미야제프 농업학교에서 생물학 교육을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7년 뒤인 1950년, 식물의 생식 과정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급 논문 심사를 받았다. 그는 1950년대 대부분을 노화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였고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유전학에서 금기시 되는 주제를 피했다.


유전학을 피하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1948년 8월, 리센코는 레닌 농업과학원에서 공개 연설을 했다. 이것은 미-소 냉전의 거대한 첫 번째 교착상태에서 비행기가 봉쇄된 베를린을 오가는, 메드베데프의 삶을 결정지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리센코의 연설은 고전 유전학에 대한 그의 집요한 캠페인의 정점이었다.


획득형질이라는 신 라마르크주의1)의 계승을 지지했던 리센코가 이끄는 미추린농법주의2)자들, 그리고 인구와 실험 유전학에서 소련의 전통의 강력한 옹호자들 사이에 약 20년간의 투쟁이 있은 뒤, 이 연설은 논쟁을 중단시켰다. 결국 리센코가 중앙위원회 즉, 스탈린이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다른 정치체계, 경제, 문화 예술을 품은 채 전쟁 상태로 상호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과학도 서로 달랐을 것이다. 그 까닭에 유전학은 소련 연방 내에서 금지되었다. 생물학자들은 해고되었고, 교과서는 내버려졌으며 분자 생물학에서 서구의 발전은 무시당했다. 메드베데프의 역사적인 글은 부정한 실태를 낱낱이 폭로했다.


리셍코의 추락 이후, 메드베데프는 책임을 원했다. 그는 소련의 한 출판사에 원고 수정안을 제출했다. 매우 엄격한 검토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검열관들은 원고의 인쇄를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원고를 컬럼비아 대학교 신문부에 보냈으며 원고는 버클리 유전학자인 마이클 러너에 의해 영역되어 출판되었다. 이것은 ‘트로핌 리센코의 부상과 추락’(1969)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고전이 되었다.


당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리셍코의 협력자들은 분개하며 그들 배후에 있던 강경파들을 당국으로 불러들였다. 1969년 에밀리그램 저널 그래니에는 1962 원고 해적판이 러시아어로 게재되었으며 나아가 소련 당국에 대한 메드베데프의 정치적 입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는 신 스탈린주자들이 여론 선동을 위해 공개재판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보안위원회가 그를 위해 염두에 두었던 운명이 아니었다.


1970년 5월 29일 금요일, 한 의사와 평범한 차림의 경찰관들은 오브닌스크에 있는 메드베데프의 주택에 나타나 그를 칼루가에 있는 정신병원에 수감시켰다. 주치의인 정신병 전문의 알렉산더 라이프 쉬프트는 리센코에 대한 메드베데프의 집착이 정신적인 불균형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후에 정신병원은 소련의 반체제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장치로 빈번하게 쓰였을 것이나 메드베데프의 경우 그를 지지하는 국제적인 정치 운동이 성행했다. 그의 쌍둥이 형제인 로이는 구소련 과학원의 탄원서, 워싱턴 DC의 국립과학원의 항의서, 국제적 신문 보도 등 국내외의 분노를 일으키면서 신속하게 그를 도왔다. 이로써 메드베데프를 풀어주는 것보다 수감하는 것이 더 성가신 일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는 출판 활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해외 서구 대중들에게 소련의 불법성을 폭로했는데- 그것들은 소련의 지하출판물(samizdat)3)들처럼 도로 밀반입되어 가정에서 읽혔지만, 그 중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그의 설명이 담긴 로이와의 공동 집필서 A Question of Madness (1971)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1973년 영국에서 1년의 임기로 머무를 허가를 얻기도 했는데, 영국으로 일단 나가자 그의 여권은 취소되었다. 해외로 보내든(Aleksandr Solzhenitsyn, 1974), 국내 가택 연금이든(Andrei Sakharov, 1980-86)간에 비평가들을 추방하는 것은 당시 그 10년간 소련의 일반적인 전략이었다. 


메드베데프는 런던에 정착해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는 앨런 로버츠와 함께 Hazards of Nuclear Power(1977)를 공동 집필했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이 책은 1957년 마야크 플루토늄 생산시설에서 발생한 키쉬엄 참사는 우랄 산맥 전역에 걸쳐 최대 100톤의 방사능 파편을 분출했다고 언급했다. 서방에 있는 그의 동맹자들조차 이를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들에게 이것이 들리지 않았을까? 메드베데프는 소련 과학체제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연구한 저서 Soviet Science (1978)에서 출판 문헌에 남은 재앙의 흔적들을 찾음으로써 우랄지역의 재앙에 대한 폭로를 두둔했다. 찾는 방법만 안다면, 그것은 평범한 풍경 속에 숨어 있었다.그는 그 후 Nuclear Disaster in the Urals (1979)에 이어 The Legacy of Chernobyl(1990)을 출간했다. 그는 체르노빌을 키시팀과 동일한 안전부주의 관행의 패턴 일부로 여겼다.


소비에트에 대한 메드베데프의 비판적인 묘사는 강력하고 설득력 있으며 원칙에 입각해있었다. 그는 혁명의 꿈에 공감했지만, 연줄 정치와 스탈린주의가 혁명의 초기 약속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했다. 소련 과학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흥미롭고 역동적이었으며 국가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던 소련 과학이지만 결국, 당신이 만나는 것은 리센코다.


그러나 무언가는 옳았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소련 수소 폭탄의 아버지이자 후에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소비에트 인권 운동가였던 사크 로프처럼, 메드베데프는 소비에트 과학 시스템으로부터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 이들은 미래 이스라엘의 정치가가 될 컴퓨터 과학자인 나란 샤란스키를 포함하여 자신들의 이민권을 부정당한 소련의 유대인 집단과 합류했다. 과학자들은 국제적인 사상과 외국 여행에 노출될 기회가 훨씬 많았고, 결국 소련에 대항하는 이들이 주목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메드베데프의 글, 특히나 소비에트 과학에 대한 글에서 얻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리센코들와 체르노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식 인프라의 병리학이 아니라 그 반대다. 모든 비효율과 검열에도 불구하고 이 시스템은 더 높은 이상에 헌신하는 비판적인 사상가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했다. 조레스 메드베데프가 그 시스템의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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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 라마르크(neo-lamarckism): 설라마르크의 진화설의 변형으로, 유전된 획득형질(獲得形質)에서 진화를 일으키는 시초의 특수한 차이를 생기게 한다는 이론이다. 이것의 옹호자들을 .신라마르크주의자(neo-Lamarckian)라 한다. 


2) 미추린농법주의(Michurinism): 생물과 환경의 관계를 중시하고, 러시아의 기후풍토에 맞는 과수의 육성방법을 연구하여 품종을 개량하는 농법이다. 이를 옹호하는 세력을 .미추린 농법주의자(Michurinist)라 한다.


3) 지하출판물 (samizdat): 냉전 시대 소련과 그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나라에서 당국의 검열을 피해 불법적으로 출판물을 자체 제작하는 일. 또는 그렇게 제작된 출판물. 경향적 성격이 강한 저항 문학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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