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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on Ideas]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철학자를 여전히 존경할 만한 이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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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레인뉴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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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us Christensenunsplash.com    



[Aeon Ideas]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철학자를 여전히 존경할 만한 이유

Why sexist and racist philosophers might still be admirable 
 



 

written by. Julian Baggini


영국의 작가이자 철학가.

최근 저서로 How the World Thinks: A Global History of Philosophy(2018)가 있다.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존경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위험해졌다. 임마누엘 칸트를 찬양한다면 여러분은 그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완벽성은 백인종에게서 이루어진다’, “노란 피부의 인디언은 재능이 미천하다’고 믿었다는 점을 상기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찬미하려면 당신은 진정한 현인이 어떻게 ‘남자는 선천적으로 우월하며 여자는 열등하다’, ‘남성은 지배자이며 여성은 피지배자’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최근 필자가 썼듯 데이비드 흄의 추도사를 쓴다면, 당신은 1753-54년 ‘나는 흑인들과 대개 모든 타 인종들을 태생적으로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고 쓴 사람에 대해 찬양했다는 이유로 인해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 것 같다. 용납할 수 없는 과거의 편견들을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그냥 무시할 수는 없지만, 도덕적으로 불쾌한 견해를 가졌다는 것이 위대한 사상가나 정치적 지도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실격시킨다고 생각한다면, 역사 속에 남을 위인은 거의 없다.


죽은 기득권 백인 남성들을 제외시켜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서양 양 쪽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도 인종차별은 흔했다. 미국 여성참정권론자 캐리 채프먼은 ‘백인 우월주의는 여성참정권에 의하여 약화되지 않으며 강화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투쟁에 참여한 그녀의 영국인 여동생 팽크허스트는 식민주의의 요란한 옹호자가 되었으며 ‘그것이 비난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우리 같은 제국의 계승자가 되는 것은 위대한 일’ 이라고 주장했다. 성차별주의와 외국인 혐오증 모두 ‘노동자’의 권리 보호라는 명분으로 노동조합 운동에서 흔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서 ‘노동자’는 비이민 노동자와 남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자 혹은 그 외의 편협한 견해들이 역사적 인물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그가 받은 찬탄의 자격을 박탈시킨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위인을 존경하지 못하는 사람은, 심지어 아주 위대한 사람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생각이 얼마나 사회적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심각한 이해 부족을 드러낸다. 선입견이 너무나도 자명하게 잘못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락한 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것을 깨닫지 못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의 격분은 모든 주변인들이 불의에 눈이 멀 때조차 자신들은 너무나 고결해서 부도덕할 리 없다는 거만한 가정을 하고 있다. 우리는 좀 더 잘 알아야만 한다. 나치 독일의 가장 골치 아픈 교훈은 유독한 시절을 겪지 않았더라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을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것을 지지했다는 점이다. 그 때 사람들이 몰랐던 것을 우리가 이제야 알듯, 우리였다면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어떤 자신감에도 근거는 없다. 오늘날 나치즘에 동의하는 것을 상상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일어난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위 천재가 그들의 선입견을 비이성적이며 부도덕적이라고 직시하는 것에 실패했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는 우리의 문화가 그 자체에 고착된 잘못된 가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사회 환경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인간 지성이라는 가정이다.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에 약간의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안락한 착각을 떨쳐 내야할 것이다. 우리가 모두가 스스로 생각 할 수 있으며 또한 해야만 한다는 계몽적 이상을 우리가 스스로의 힘만으로 모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초계몽 판타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생각은 환경에 의해 종종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는 심오한 방식들로 형성된다. 천재들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이러한 영향력에 의해 제한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적 과대망상을 가지고 있다.   


개인이 부도덕한 시스템에 깊이 침잠해 있을 때, 책임 소재를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이것은 도덕적 책임의 소재지가 완벽하게 자율적인 개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혐오스러운 관념들과 관습들이라는 사회적 조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면, 두려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책임으로부터 풀려나 도망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절망적인 도덕적 상대주의와 함께 남겨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난이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에는 근거가 없다. 여성혐오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사회적 산물이므로 개인적 산물보다 더 많이는 아니더라도 그 못지않게 혐오스럽다, 흄을 용서하는 것은 인종주의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양해하는 것은 성차별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는 결코 괜찮은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괜찮다’고 단순히 잘못 믿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수용이 과거의 선입견에 대한 그럴싸한 포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와 흄 같은 인물들조차 시대의 부산물이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은 아무리 위대한 사상일지라도 시대의 만연한 실수와 악을 분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겸손을 불러온다. 또한, 그 깨달음을 통해 그들의 가장 불명예스러운 발언에서 무례하게 표면으로 분출된 선입견들이 그들 생각 다른 곳에도 잠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게 해야 한다. 죽은 백인 남성 철학자에 대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적 비평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것으로, 눈에 띄는 여성혐오는 훨씬 음흉한 혐오의 빙산, 그 일각일 뿐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때때로 이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각지대들은 아주 지엽적어서, 일반적인 시야는 늘 완벽히 선명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혐오에 대한 고전주의자 에디스 홀의 변호는 어떻게 한 사람의 철학가를 그가 지닌 최악의 일면으로부터 구제해야하는지 보여주는 패러다임이다. 그녀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보다는 그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오늘날의 그 역시 편견을 갖도록 이끌것인지 묻는 편이 더 나은 검토라고 주장한다. 증거와 경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방성을 고려 할 때, 오늘날의 그에게 남녀평등을 설득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점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흄 또한 마찬가지로 늘 경험을 따랐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라면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들에 대해 경멸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철학을 적용한 방식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기 위해 근본 철학 그 이상을 살필 필요는 없다.

 

과거 사상가에 대한 변호를 주저할만한 한 가지 이유는, 죽은 사람들을 변호하는 일이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변호를 동반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우리가 흄, 칸트, 아리스토텔레스의 편견에 대해 비난할 수 없다면, #MeToo 운동에 의해 불려내진 사람들, 그것을 지극히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 환경에서 저지른 행동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결국은 하비 웨인스타인도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캐스팅 소파’문화 때문 아니었나?


*캐스팅 소파(casting couch): 할리우드 황금기에 많은 여배우들이 제작자에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제공함으로써 영화배우로 입문하였다는 풍문으로부터 연유한 용어.


그러나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고, 인정할 수 있으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저지른 행위가 범죄라면, 그들은 정의를 대면하게 될 수도 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편견을 용인할 수는 없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주입된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왜곡된 가치들을 창조한 것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가치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책임지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죽은 사람에게는 이 같은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응징하기 위해 화를 낭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과거의 과오를 한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준을 잣대로 덜 계몽된 시대의 개인이 저지른 잘못을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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